증산도 신도 충격적인 살인사건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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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적 작성일19-03-18 05:56 조회5,461회 댓글5건본문
진 술 서
안세찬 안중건 교주의
살인지시로 일어난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의 전말
작성자 : 로상균
주민번호 : 62ㅇㅇ13-ㅇㅇㅇㅇㅇㅇㅇ
주소 : 대전시 동구 성남동
전화번호 : 010-30ㅇㅇ0-9ㅇㅇ7
전직 : 증산도 수석수호사, 총무수호사, 청소년부수호사, 멀티미디어팀장, 월간개벽 편집장
※ 아래 내용은 2014년 11월 5일, 대전지방경찰청에 접수한, 안중건 증산도 종도사에 대한 형사고소장의 일부입니다. 이번에 증산도 측에서 안선경, 이종성, 안순용 등의 죽은 안세찬씨 자손들과 일부 증산도 신도들이 죽은 사람의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 옴에 따라, 다시 한번 동부경찰서에 참고자료로서 제출하는 것입니다.
총목차
1. 2001년 10월 25일에 있었던 홍성렬 교수부부 살인사건
2. 이근직이 보고 후 안중건의 허락과 지시를 받고 실행에 옮김
3. 안세찬 안중건과 홍성렬과의 운명적인 만남
4. 홍성렬 테러에서 살인에 이른 10년의 과정
5. 홍성렬 중간 살인교사자 이근직은 누구인가?
6. 이근직과 노상균의 만남
7.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증산도 본부에서 일어났던 일들
8. 2005년에 행동대원 가운데 한 사람을 알게 되다
9. 2010년 4월 홍성렬 살인사건 범인 3명이 체포되어 발표되다
10. 홍성렬 살인교사자는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다
1. 2001년 10월 25일에 있었던 홍성렬 교수부부 살인사건
홍성렬 교수(1935년 생. 2001. 10. 25 당시 66세)는 그의 부인 정분 여사와 함께 2001년 10월 25일 증산도 신도 3명에 의하여 예산 자택에서 폭행 살해를 당한 분이다. 2010년 범인을 잡고 보니 증산도 신도인 장ㅇ진(59), 심ㅇ규(61) 및 이ㅇ석(71) 3인이었다. 이들은 살인죄로 법원으로부터 각각 10년형(장ㅇ진) 과 16년형(심ㅇ규, 이ㅇ석) 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수형번호 장ㅇ진 177ㅇ4, 심ㅇ규 321ㅇ8, 이ㅇ석 274ㅇ3).
이들은 같은 증산도 신도이며 증산도사상연구소 행정실장이라는 간부직을 맡고 있던 이근직(1956~2002년 6월 자살 사망)의 사주를 받고 홍성렬 교수부부를 살해하였다고 자백하였다. 그런데 이근직 행정실장은 홍교수 부부 살해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 뒤인 2002년 6월경에 의문의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사건 발생 9년 만에 살해 범인을 잡았으나 살인 지시자는 이미 자살로써 죽은 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과연 홍성렬 교수부부 살인사건의 최종 지시자는 이근직 행정실장인가?
이근직 교수는 중간 하수인에 불과한 사람이었고, 최종 지시자는 증산도 교주였던 안세찬과 안중건 이었다. 2001년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수년전부터 안세찬과 안중건은 크고 작은 신도 교육에서 홍성렬을 증산도를 파괴하려는 악마로 언급하면서, 전국의 모든 신도들에게 그에 대한 적개심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었다. 1999년 증산도 문화소식지 7월호에는 안중건 종정의 교육 내용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안중건은 홍성렬을 증산도 최대의 적이며 악마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1991년에 안세찬이 간부교육 때 발언한 녹취록에도 홍성렬 교수를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나온다. 안세찬은 증산도의 도세발전에 홍성렬이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고, 심복인 김동훈(56, 당시 대원출판사 영업부장, 현 증산도 홍보팀장 ) 신도를 불러서 홍성렬의 손을 가져 오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김동훈의 증언) 이것은 그의 손을 잘라서 병신을 만듦으로서 글을 못 쓰도록 하려는 지시였다. 이 지시를 받은 김동훈은 혼자서 행동으로 옮기려던 할 때에 다른 팀이 먼저 홍성렬을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
홍성렬 교수부부를 살해한 3명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교주 부자인 안세찬과 안중건의 지속적인 신도 교육을 받고 홍교수를 제거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이근직의 주선으로 서로 만났다. 그리고 한 팀이 되어 실행을 모의하고 연습하다가 결국 2001년 10월 25일 행동으로 옮겼다. 과연 서로 모르던 이 3명을 누가 홍교수 살해사건의 한 팀으로 연결해 준 것인가? 본부에 있던 이근직 행정실장 혼자만으로는 이것을 주선할 수가 없다고 본다. 여기에는 충청지역과 천안지역의 도장 책임자들이 개입되었다고 보여진다.
2. 이근직이 보고 후 안중건의 허락과 지시를 받고 실행에 옮김
2001년 초, 장영진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근직(1956~2002) 행정실장을 찾아가서, 자신이 증산도와 교주 안세찬 종도사를 비방하는 홍성렬 교수를 제거하겠다고 말하였다. 당시 이근직 행정실장은 증산도 간부 가운데 실세 중에 실세였다. 장영진이 이근직 실장을 찾아온 것은 자신의 실행 의지를 밝히고, 거사에 필요한 제반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특히 안세찬과 안중건에게 자신의 거사 사실을 보고하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허락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이근직 행정실장은 안세찬과 안중건과 가장 밀착되어 있는 최고 고위급 간부 신도였다. 증산도는 1999년에 안세찬 안중건 교주의 지시에 따라 증산도사상연구소 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실무 작업을 한 사람이 이근직이었다. 이근직은 매일같이 안세찬 안중건에게 보고를 들어갔으며, 사상연구소 개설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증산도 운영 전반에 관한 하명을 전해 듣는 위치에 있었다. 이근직 실장은 장영진의 확고한 실행 의지를 확인하고는 이를 안중건 종정에게 보고하였을 것이고, 이근직의 보고를 받은 안중건 종정은 조직의 다른 부서(특히 도전답사팀)에게 지시하여 홍성렬의 인적사항과 주소 등 모든 자료를 제공하였을 것이 확실하다.(당시 도전 답사팀 소속 공ㅇ걸(1971)이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홍성렬 교수 집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공ㅇ걸을 파견한 것은 안중건이었다.)
이근직 행정실장은 장ㅇ진과 함께 행동에 옮길 행동대원들을 충청도 지역의 도장 책임자들을 통하여 알아보았고 장ㅇ진, 심ㅇ규, 이ㅇ석을 한 팀으로 묶어 주었다. 이들은 2001년 초부터 서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길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는 드디어 2001년 10월 25일 행동으로 옮겼다. 당초에는 홍성렬 교수 한사람만을 집 밖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홍교수 부인이 뭔가 눈치를 채고 홍교수가 나가는 것을 만류하자 결국 집안에서 실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홍교수 부인마저 함께 살해 하였다.
3. 안세찬 안중건과 홍성렬과의 운명적인 만남
안세찬(1922~2012) 종도사는 왜 홍성렬(1935~2001)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가? 또한 교주 안세찬의 아들이면서 증산도 차기 교주예정자인 안중건은 왜 홍성렬을 제거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홍성렬 교수가 증산도 발전에 가장 큰 방해요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내력이 있는데 얘기는 해방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해방직후 24살의 청년 안세찬은 전라북도 김제 용화동에 있는 증산교에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증산교 교주는 이상호(1888~1966)와 그의 동생 이정립(1895~1968) 형제였다. 24살의 청년 안세찬은 60살에 가까운 나이의 이상호 이정립이라는 원로 신앙인 밑에서 그들을 교주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젊은 안세찬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충청도 아산 서산 예산 홍성 천안 등지에서 정력적인 포교활동을 해서 자신의 세력을 크게 모았다. 안세찬은 어린 나이였지만 4~5년이 지나자 충청도 지역의 신도관리 책임자가 되었으며, 교주인 이상호 이정립 형제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끝나고 젊은 안세찬은 교주와 불화를 하게 되었고, 파직을 당하여 증산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안세찬은 대전으로 와서 자식들을 낳고 키우고 살다가 1975년 무렵 김제 증산교 본부로 찾아가 증산교권을 잡아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의 반대에 의해 실패하게 되자 1978년에 대전에서 증산도라는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78년에는 증산교라고 했다가 84년에 증산도로 교명을 바꾸었다.).
6.25 전쟁이후 젊은 안세찬이 떠나가 버린 김제의 증산교에는 홍성렬이란 젊은이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젊은 홍성렬은 예산농전(지금의 공주대학교) 교수였는데, 교주인 이상호 이정립 형제를 깍듯이 모시고 증산교 차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6과 1968년에 이상호 이정립 창교주 형제가 차례로 죽자, 홍성렬은 그 후에 임기제로 돌아가는 종령(최고 지도자)을 3번이나 역임하였다.
대전에서 증산도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든 안세찬 종도사는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 앞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몸담았던 증산교의 교주였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를, 자신을 쫓아내버린 아주 불의하고 못 되먹은 교주라고 비방하였다. 한편 홍성렬 종령은 6.25 직후 증산교를 등지고 떠나간 안세찬이야말로 이상호 이정립 형제 교주를 배반하고 나간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등 서로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1988년 홍성렬 교수는 ‘범증산교사’ 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서 과거 해방직후에 있었던 안세찬과 이상호 이정립 형제와의 불화와 대립을 자세히 기술하면서, 대전의 증산도는 전라도 김제에 본부를 둔 증산교의 한 지파에 불과하며, 그 본질이 불의한 교단이라고 기술하였다. 이 책자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계기로 해서 증산도의 안세찬 안중건 부자는 증산교의 홍성렬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도들 앞에서 홍성렬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4. 홍성렬 테러에서 살인에 이른 10년의 과정
1988년 홍성렬의 ‘범증산교사’가 나온 직후 안세찬과 안중건의 지시를 받은 증산도 간부 신도 3명(윤세창 등 3인)이 예산의 홍성렬 교수 자택을 찾아가 항의한 일이 있었다. 그들이 찾아간 이유는 왜 자신들의 교주인 안세찬씨를 이렇게 혹평하며 썼느냐고 따지러 간 것이었다.(홍성렬씨 지인 강희정씨 증언, 010-6ㅇㅇ1-4ㅇ30) 이것은 간부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교주 안세찬 안중건 부자의 지시를 받고 간 것이었다.
1991년 무렵 증산도 신도들에 의한 홍성렬 교수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예산에 살던 홍성렬 교수는 매주 토요일 서울로 올라가서 신림동에 있는 증산회관이란 곳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어느날 복면을 한 괴한 여러 명이 홍성렬 교수가 머무는 증산회관으로 난입하여, 갑자기 담요를 뒤집어씌우고는 몽둥이로 무참히 가격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홍성렬 교수와 또 다른 1명이 있었는데 이들도 함께 봉변을 당하였다. 이때 당시 홍교수는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몽둥이질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머리는 맞지 않았고, 큰 부상은 없었다고 한다.
1992년 무렵 홍성렬 교수는 예산 자택에서 ‘월간 천지공사’ 라는 정기 간행물을 만들어 세상에 배포하고 있었다. 이 작업에 강희정씨와 김봉렬이라는 젊은 사람이 참가했는데, 김봉렬은 기자의 신분으로 대전 괴정동에 있는 증산도 본부를 방문하여 취재한 일이 있었다. 김봉렬씨는 취재를 가자마자 붙잡혀서 일주일간 감금되었고, 온 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폭행을 당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뒤 증산도 신도들은 김봉렬의 눈을 가린채 자동차에 태워서 산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 가보니 이미 구덩이가 파져 있었다. 증산도 간부 신도들은 김봉렬에게 홍성렬은 아주 불의한 놈이며 그를 따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 살려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구덩이에 묻어 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김봉렬은 마지못해 서약서에 서명하고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 돌아갔다. 김봉렬은 처음에는 경찰에 고소하려고 했으나 곧 마음을 돌려먹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홍성렬 교수와 결별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증산도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이상 강희정 증언, 홍성렬 교수 사위인 배성의 공주대학교 학장 증언, 010-5249-5768).
1997년부터 안세찬 안중건 부자는 신도들에게 임박한 시한부 종말 개벽설을 강하게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세기말이었고, 세기의 교대기 였다. 안세찬 안중건 부자가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시기로 말한 것은 2004년 갑신년이었다. 안세찬 안중건의 발언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증언목록 참조). 1998년(무인년), 1999년(기묘년), 2000년(경진년)과 2001년(신사년), 2002년(임오년) 및 2003년(계미년)에 이르는 이른바 인묘진 사오미 6년의 준비기간을 지나고 2004년(갑신년)에 개벽 종말 현상이 올 것이라고 그들 부자는 줄기차게 강조하고 신도들에게 주입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바로 홍성렬 교수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배용덕이라는 분이 ‘증산사상연구회’를 만들어서 대학 교수 및 지식인들을 상대로 강증산의 사상을 두루 알리고 있었는데, 배용덕 회장이 돌연 사망(1998년)하자, 부회장이었던 홍성렬 교수가 차기 회장이 될 가능성이 크던 시절이었다. 만일 홍성렬 교수가 증산사상연구회 회장이 된다면, 홍성렬 교수의 위상이 높아지고, 홍성렬 교수를 중심으로 반(反) 증산도 세력이 더욱 결집하게 될 것이라고 안세찬 안중건 부자는 판단하였다.
1997년부터 신도들을 대상으로 임박한 시한부 종말 개벽설을 강하게 교육하던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홍성렬 교수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증거자료 참조). 1999년 7월 안중건 종정은 신도 전체 교육을 통하여 증산도의 조직성장에 암적 요소인 여러 명의 이름들을 거명하였는데 그중에 수위(首位)가 홍성렬 교수였다.
한편 1999년 안중건 종정은 임박한 시한부 종말 개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도조직을 상명하복의 군대조직으로 개편한다는 발표를 하였고, 400명을 한 진(陣)으로 하는 제세핵랑군 조직을 6진까지 조직하였다(2400명). 제세핵랑군은 안중건을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군대조직으로서 철저한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였다(증거사진과 증거자료 참조). 당시 안세찬 안중건 교주 부자는 제세핵랑군 12000명을 조직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자신들이 12000명에게 도통을 내려주는 인간하느님이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안씨 교주 부자가 말하는 임박한 개벽설을 믿었으며, 그들은 안세찬과 안중건의 말을 인간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에 의해 홍성렬 교수를 불의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지속적인 교육이 있게 되자 맹목적인 신도들이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홍성렬 교수를 살해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드디어 이를 실행에 옮길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장ㅇ진(5906)이었다. 당시 안중건 종정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늘상 이렇게 말하였다. “왜 하늘의 천지신명은 홍성렬이를 잡아가지 않느냐?” “ 신도 가운데 의로운 신도가 한명만이라도 있다면 어찌 홍성렬이 같이 불의한 놈이 세상을 활개치고 다닐 수 있단 말이냐?”. 당시 나 자신도 이러한 교육을 받고 나서는 내손으로 홍성렬이를 죽여서 교주에게 충성을 다 해야겠다고 결심하곤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길 신도가 없는가 하고 찾아보곤 했을 정도였다.
한편 이무렵 안중건의 교육을 받은 일부 행동대원들에 의한 김탁 교수, 윤경종씨, 이돈준씨, 김준걸씨, 유재신씨 등의 폭행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김탁, 윤경종(61), 이돈준(57), 김준걸은 모두 한때 증산도 신도였으나 증산도의 사이비성을 알아차리고 증산도 조직에서 이탈한 사람들이었다(참고자료).
5. 홍성렬 중간 살인교사자 이근직은 누구인가?
이근직(1956~2002)은 증산도사상연구소 행정실장으로 홍성렬 교수를 살해한 범인 장ㅇ진과 심ㅇ규(61) 등으로부터 살해교사자로 지목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홍성렬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2002년 6월에 의문의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홍성렬 살해범인이 2010년 잡혔으나 살해 지시자는 8년 전에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기에 더 이상 수사의 진전은 없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안세찬과 안중건은 1998년 겨울부터 1999년 봄에 이르는 시간에 인문사회 계열 박사급 인재들을 모아서 증산도사상연구소 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때 대략 50여명의 박사급 연구원을 뽑았는데, 연구소 개설의 실무일을 이근직 행정실장이 맡았다. 이근직 실장도 행정학 박사였으며 안세찬 안중건 교주 부자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았기에 적격 이였다 .
이근직 실장은 행정학과 출신이고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대학교수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한 신도가 아니고 증산도 본부의 전문 일꾼이었다. 그는 그의 학력과 이력으로 인해서 증산도 교주 안세찬의 자식들 뒷 문제를 처리해주는 가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세찬의 막내아들 중에 망나니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문제를 일으키면 이를 무마하는 등 역할을 하였다.
이근직 행정실장은 매일 안세찬과 안중건에게 보고를 들어가는 위치였다. 보고 시에는 증산도사상연구소 일뿐만 아니라 증산도 운영 전반에 대한 일에 대해 하문을 받고 나름대로 의견을 올리는 일급 간부가 되어있었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대학교수 출신인 이근직 실장을 중용하고 있었다. 50명에 육박하는 사상연구소 실무책임을 이근직 행정실장에게 맡겼으며, 기타 여러 용도로 활용하였다.
6. 이근직과 노ㅅ균의 만남
나(노상균)는 1998년 대전 증산도 본부로 발령받아 내려오면서 이근직 실장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5살 연상이었으나, 신앙 경력은 내가 위였다. 이근직씨는 1991년부터 증산도 신앙을 했고, 나는 1982년부터 했으니 신앙은 내가 선배였다. 나는 글쓰는 부서인 본부 연구부로 발령받아 오면서 이근직 교수와 가깝게 알고 지내게 되었다.
당시 증산도의 신앙 분위기는 시한부 개벽설 바람이 불기 시작되는 때였다. 안운산과 안경전 교주부자는 1998년 무인년과 1999년 기묘년을 무기천지 한문이라고 하면서 종말상황으로 들어가는 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 멀지 않아 몇 년 안에 종말 현상이 닥친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증산도의 분위기는 시한부 종말설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런데 소위 증산도의 개벽이라는 것은 지구촌 60억 인류가운데 채 1억도 살지 못하는 종말이었다.
당시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에 의한 홍성렬 비방 발언이 크고 작은 교육에서 지속되고 있었고, 시한부 종말설과 상명하복의 군대문화, 교주부자에 대한 신격화에 물들어가던 신도들은 홍성렬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어느날 이근직 실장은 해방직후 증산교 상황에 대한 논문을 쓰려는 계획을 가지고 나 노상균을 찾아왔다. 자신은 사상연구소 행정일 때문에 바쁘니, 대신 논문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수고비는 준다고 하였고, 완성되면 공동이름으로 발표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근직 실장과의 인연이 더욱 가깝게 되었다.
이근직 실장은 사상연구소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증산도에 반대하는 세력을 척결하는 소위 난법대책팀에서도 속해 있었다. 난법대책팀이라는 것이 특별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증산도 본부의 상위 간부들로 구성되는 팀이었다. 거기에서 이근직 실장과 나는 자연스럽게 만나서 함께 의견을 교환하였고, 반(反) 증산도 세력에 대한 응징에 대해 숙의를 하게 되었다.
2001년 6월경에 이근직 실장은 홍성렬을 비난하는 글을 써 가지고 세종기획 사무실(연구부가 세종기획으로 개편됨)을 찾아왔다. 그 글은 2001년 7월호 월간 개벽지에 실렸는데, 그가 가져온 글의 초고상태에다가 내가 문맥 등 기초적인 것을 가다듬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원고를 가지고 온 그날 이근직 실장만 온 것이 아니라 안중건 종정도 함께 왔었다. 사무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니 안중건과 이근직이 함께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건도 함께 온 것은 원고 내용이 홍성렬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1년 10월 25일 충남 예산에서 홍성렬 교수부부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직후 뉴스를 통해서 알려졌는데, 나는 증산도 신도들이 죽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1997년 이후로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크고 작은 교육에서 끊임없이 홍성렬을 악마로 몰며 비난하였다. 나도 그런 교육을 받고 나서는 천고의 악마인 홍성렬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런 마음을 먹었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살인뉴스를 접하고는 “드디어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죽임을 당한 것은 홍성렬 교수 한사람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마저 참혹하게 돌로 쳐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누가 죽였을까? 증산도 신도가 죽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건만 도무지 누가 행동대원으로 나서서 죽였을까? 누가 실무책임을 맡았을까? 하는 것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틀 뒤 쯤의 일로 기억된다. 사무실 일로 인해서 경상도 쪽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대전역에서 아침에 이근직 실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도 무슨 일로 경상도 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근직 교수의 고향이 경북 영주였다. 그가 무슨 일로 경상도 쪽으로 가게 된 것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다. 서로 아는 사이였으니 반가웠다.
그런데 나는 이근직 실장을 보자마자 그가 홍성렬 교수를 죽이는데 주역으로 일한 핵심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난법대책팀 일원이었고, 안세찬 안중건에게 수시로 보고 들어가는 최측근 간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안세찬 안중건을 위해 일하는 한마디로 말해서 가신家臣이었다. 나는 그가 안중건의 허락과 지시를 받고 이번 살인사건을 주도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그와 대전역 대합실에서 만나게 되자,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을 던졌다. “엊그제 살인 무사히 잘 끝난 것 같습니다.” 나의 예상치 않은 갑작스런 “살인” 발언에 그는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무엇을 몰래 했는데 들킨 그런 표정이었고, 반응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가 당황하던 모습이 역력히 떠오른다.
그는 크게 당황해 하였다. 한마디로 의표를 찔린 것이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니 노상균이가 어떻게 알았지? 이건 특급 비밀중에 비밀인데.’ 그는 당황해 하면서 나를 달래려고 가까이 있던 커피 뽑는 기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커피를 뽑아주면서 나를 안심시키고 단속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아니, 노상균 ,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의 태도와 이런 말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더욱 확신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당연한 일이지. 홍교수 살인에는 이근직 교수가 앞장을 선 것이구나!’ 이근직 교수는 커피를 뽑아주고는 당황하는 기색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디 가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들으면 정말 큰일 납니다. 우리는 태사부님 사부님께 누가 되는 일을 조금도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태사부님은 안세찬을 사부님은 안중건을 증산도 신도들이 지칭하는 말이다.)
나는 행동대원으로 나선 신도들이 누구이며, 거사 경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이근직 실장이 안중건의 허락과 지시를 받아 실무적인 작업을 했고, 그동안 도전 답사팀이 홍성렬에 대해 축적한 정보를 넘겨받아서 활용했을 것이며, 지방도장 책임자를 통하여 함께 살인에 참여할 인맥을 소개받았다는 것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내가 후일 2004~2006년에 최고 간부인 수석수호사의 위치에 올라가서 안세찬과 안중건의 가장 가까운 최 일급 간부가 되었을 때, 안중건의 직접 지시를 받아 여러 건의 납치 폭력 사건을 직접 주도하면서도 확인한 일이었지만, 2001년 당시에 홍성렬 제거에는 이근직이 안세찬 안중건의 지시와 허락을 받아 몇 몇 간부와 행동대원 신도들이 합작으로 벌인 것임을 환히 꿰뚫을 수 있었다.
증산도는 조직 운영면에서 북한과 거의 흡사하였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 대한 절대충성을 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처럼, 증산도도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에 대해 절대 충성을 하는 자만이 간부를 역임할 수 있었고, 후천의 12000 도통군자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모두들 믿고 있었다. 안세찬 종도사와 안중건 종정은 신도들에게는 인간하느님이었고, 신적인 존재였다. 홍성렬 교수 살해사건 같은 일은 결코 이근직 혼자서 일을 꾸미고 몇 몇 행동대원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홍성렬의 제거에는 반드시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의 허락과 지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것이 바로 교주를 신격화하고 시한부 종말론을 부르짖는 증산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증산도 모든 조직과 운영은 안세찬 안중건이 장악하고 있었고, 간부들은 지시를 받아 일을 추진하는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였다.
마치 북한에서는 휴전선에서 대포 한발 쏘는 일도 최고권력자의 결재를 맡아야 하는 것처럼, 증산도에서는 모든 것을 안세찬 종도사와 안중건 종정의 결재를 맡아서 처리하였다. 특히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면 안세찬과 안중건의 결재를 맡아서 이루어졌다. 하물며 증산도에 위협이 되는 최대 난법자를 살해하는 일인데 이것이 어찌 이근직 혼자서 계획해서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안중건에게 사전에 보고되었고, 그의 허락과 지시에 의한 타 부서로부터의 업무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나의 예상치 않은 유도 발언에 마음을 들킨 이근직 실장은 혹시라도 내가 다른 곳에 가서 발설하는 말실수를 할까봐 못 믿어 하는 눈치였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고 나에게 보안유지를 당부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와 제세핵랑군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 출장 목적지가 달랐는데,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저녁 무렵에는 다시 만나서 귀가하는 배려를 하게 되었다. 이른바 나를 적극적으로 단속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나를 못 믿어 한 것은 내가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일러바칠 것이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경솔한 언행으로 타인에게 누설이라도 하면 어찌하나 하는 그런 염려였다. 나는 사회생활이 부족하고 순진하고 경솔한 면이 있어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그가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날 기차 안에서 공적 사적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대화를 하는 도중에 “태사부님” “사부님” “홍성렬”이라는 용어를 쓰자, 그는 조용한 소리로 나에게 말하였다. 그런 용어는 도장 안에서만 쓰고 밖에서는 “회장님”, “사장님”, “홍”이라고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지금도 나는 회장과 사장이라는 용어를 즐겨 쓰는데 이것은 그날 그가 나에게 일러준 것이 강하게 가슴에 새겨진 까닭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었고, 안세찬 안중건 부자에 대한 충성심과 자신이 최측근의 간부임을 은연중 강조하였다.
7.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본부에서 일어났던 일들
2001년 9월 11일에 세상에서는 이른바 뉴욕의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안세찬 안중건의 시한부 종말론 발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노골적으로 몇 년 안으로 다가올 시한부 종말론을 강하게 발언하고 있었다. 안세찬과 안중건을 도통을 줄 대두목으로 믿는 신도들은 이에 동화되어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고,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거나, 재산을 정리하여 시한부 삶에 맞추어가고 있었다.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의 수사망이 대전의 증산도 본부 쪽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안중건 종정은 본부 간부들에게, 자신이 홍성렬을 비난하는 발언을 적었던 노트의 해당 부분을 찢어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증산도 방송부에 보관되어 있는 안세찬 안중건의 홍성렬 비방 발언을 녹화한 테이프를 모두 수거하여 없애버리도록 지시했다. 이른바 증거인멸 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 안중건이 발언 했던 녹음 테이프 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돌아가자 본부 분위기가 약간 뒤숭숭했다. 마침 증산도 본부 간부 중에 예산 출신이었던 조ㅊ희(63) 신도의 대전 집으로 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찾아온 일이 알려졌다. 수사망이 증산도 쪽에 혐의를 두고 좁혀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홍성렬 교수 살해사건에 얽힌 수사기관의 일들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체 없이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에게 알려졌다.
해가 바뀌어 2002년 임오년으로 넘어갔다. 나는 혹시나 나에게도 경찰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것은 2001년 봄에 단독으로 예산에 있는 홍성렬 교수의 집을 방문해서 하루 밤 자고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교수 방에 있는 방문록에다가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온 적이 있었다. 물론 이름은 본명을 쓰지 않고 다른 이름을 썼지만 혹시나 하고 걱정을 하였다. 나는 90년대 초부터 2001년까지 홍교수와 3번의 만남을 한 적이 있었다.
2002년 상반기는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대한민국이 온통 붉게 물들 때였다. 도문은 안세찬 안중건 교주 부자가 일으키는 시한부 종말 개벽 분위기에 물들어 많은 신도들이 시한부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성금을 내고,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는 신도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갑자기 이근직 교수가 농약(제초제)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뜻밖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왜 자살을 했단 말인가? 그는 자살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곧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는 죽기 몇 달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만나서 자신이 죽은 이후에 남은 가족(처와 어린 자식 3명)의 생계를 잘 보살펴 달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안중건 종정의 사촌동생인 안ㅈ겸(67) 국제부 수호사를 만나서도 그런 얘기를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자신이 죽어야만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에게 가는 의혹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과연 증산도 신도가 교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당시 증산도 신앙 분위기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안세찬은 증산상제님과 버금가는 대두목이었고, 60억 인류의 생과 사를 판단하는 하느님의 대행자 곧 인간 하느님이었다. 안중건도 안세찬과 음양일체의 관계로서 인류를 추수하는 사람이라는 교리가 정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안중건도 사실상 교주였다. 신도들에게는 안세찬과 안중건은 죽어 귀신이 된 영혼에게 조차도 면죄부를 주거나 죽어서 잘되게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존재로 신격화가 되어 있었다. 이근직 실장은 이러한 그릇된 신앙관에 철저히 물들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좁혀오는 수사망을 느끼면서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죽어 귀신이 된다 하더라도 대두목인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가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보살펴주고, 자신의 영혼마저 구제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근직 실장은 물론 행동대원 3명도 당시에 그러한 생각을 했을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를 의로운 행동 즉 의거(義擧)로 생각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들 생각에 이제 곧 세상에는 후천개벽이 오며 증산도 천하로 바뀐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 부자는 지구촌을 다스리는 만국 천자가 되고, 잘 믿은 신도 12000명에게 도통을 주며 영과 육을 모두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다, 안세찬 안중건은 인간 하느님이고 인간상제이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이 한 목숨 바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란 말인가!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근직 실장이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 이후 안세찬 종도사는 직접 나서서 그를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이근직 교수의 부인 김ㅇ홍(67) 신도는 증산도 본부 일꾼으로 발탁이 되었고, 지금도 증산도 상생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8. 2005년에 행동대원 가운데 한 사람을 알게 되다
2004년은 안세찬 안중건 부자가 그동안 줄곧 종말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한 운명의 해였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포교50년공부종필’ 이라는 강증산의 말을 시한부 종말설의 근거로 줄기차게 인용하였다. 교주 부자는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누군가의 나이 50년이 차고나면 그 다음해에 개벽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말했다. 그럼 50살은 누구의 나이를 말하는 것인가? 바로 증산도에서 붓대를 쥐고 교리책을 펴내던 안중건 종정의 나이 50이라고 그들 교주 부자는 강변했다. 안중건 종정은 1954년 음력 9월 15일 생으로 그의 나이가 만 50을 채우는 해가 2003년 9월 15일이었고, 그 다음해인 2004년은 개벽이 일어난다는 시한부 종말 개벽의 해였다.
당시 증산도 신도의 숫자는 8000명에 이르는 숫자였다. 전국의 대부분 신도들이 2004년에 개벽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에 기다리던 종말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가 주장했던 천연두 발생, 남북한 전쟁인 상씨름 발발, 괴질 병겁 발생은 더더욱 없었다. 다만 2004년 12월 26일 서남아시아에서 대지진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을 뿐이었다. 안중건과 대다수 신도들은 다가오는 2005년 을유년에나 종말이 올 것을 기대하며 아쉬운 마음과 함께 한해를 넘기게 되었다.
나는 2004년 5월에 본부 수석수호사로 발탁이 되었다. 수석수호사란 본부와 지방의 모든 간부들을 지휘할 수 있고, 증산도 내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최고 간부의 위치였다. 그런데 막상 수석수호사의 보직을 받아서 포교와 인사를 다루는 본부 포정원으로 옮겨가 보니, 종말이란 것이 2004년에 결코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설혹 종말이란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도 증산도의 조직 능력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증산도의 실상에 눈을 뜬 해가 바로 2004년~2005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정말로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2005년 들어서 시한부 종말론과 그릇된 지도자 신격화에 반대하는 반(反) 증산도 세력이 이곳 저곳서 등장하고 있었다. 2005년 한 해 동안 나는 안중건 종정의 지시를 따라 증산도를 이탈하여 증산도에 대항하는 신도들을 유인 납치 겁박 테러하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다. 임재현(65) 신도 유인 납치 겁박 테러 사건, 곽시환(69) 신도 유인 납치 테러 겁박 사건, 최정학 신도 유인 납치 테러 겁박 사건 등을 안중건 종정의 지시를 받고 수석수호사인 내가 주도하여 처리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증산도를 절대 올바른 단체로 알았으며, 안세찬 종도사와 안중건 종정을 인간 하느님으로 믿고 있을 때였다. 2005년은 특히 서산 동문도장의 강훈규(63) 수호사를 중심으로 한 몇 명의 신도들이 증산도에 도전해 오는 풍류도 간부 김병기라는 사람을 쇠파이프로 머리를 때려서 폭행치사 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김병기가 죽지 않아서 살인미수로 그치고 말았지만 제 2의 홍성렬 교수 살인사건처럼 비화할 만한 사건이었다.
2005년 여름 어느 날 천안에 있는 어떤 신도가 내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와서 받게 되었다. 내용인즉 심ㅇ규라는 신도가 술만 먹었다 하면 죄책감에 자신이 홍성렬을 죽였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심ㅇ규라는 신도가 홍성렬 교수를 죽인 행동대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안이 급박했으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즉시 차를 몰고 천안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천안에 도착할 무렵 안중건 종정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안중건에게 알리지 않고 갑자기 천안에 온 자초지종을 말하니 안중건은 그곳 수호사인 강훈규에게 상황을 인수인계하고 그냥 대전 본부로 복귀하라고 말하였다. 나는 안중건과의 전화대화를 통해 이 상황을 안중건이 직접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무말 없이 복귀하였다. 그리고 서로 일체의 내색도 없이 지나게 되었다.
2006년 나는 수석수호사에서 총무수호사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청소년부수호사를 겸임하며, 또한 안세찬과 안중건의 말씀 테이프를 만드는 멀티미디어 팀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후 상생방송이 만들어지면서 방송 강사와 교육강사로써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2006년까지 종말현상이 오지 않자 증산도의 신도숫자는 급속히 격감하고 증산도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9. 2010년 4월 홍성렬 살인사건 범인 3명이 발표되다
2010년 4월 초순, 경찰은 9년전 있었던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증산도 신도 3명을 검거했다는 발표를 하였다. 나는 이 뉴스를 듣자마자, 증산도의 안세찬과 안중건 교주부자에게 큰 화가 닥치고 증산도의 운명에 큰 먹구름이 낄 것으로 생각하였다. 증산도의 핵심 간부를 역임한 나로서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박봉을 받고 조직생활을 해 왔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증산도의 안세찬 안중건을 위하는 최 일선 간부가 바로 나였다.
며칠간 고민하던 나는 4월 중순 어느 날 새벽 2시에 안중건이 거처하는 집으로 찾아가서 전화로 안중건의 비서에게 찾아왔다고 연락을 하고는 기다렸다. 2시 30분에 안중건이 밖으로 나와서 둘이 새벽 5시 30분까지 산책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안중건에게 홍성렬 교수 살해범으로 증산도 신도 3명이 잡힌 것을 말하고, 이것이 도문에 미칠 영향과 아울러 그 해결책을 말하였다. 나는 전국 광역 책임자인 수호사들을 빠른 시일 안에 모두 본부로 불러들여서 상황을 공유하고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자고 말하였다.
안중건은 내 말을 듣고는 반대하였다. 안중건은 말하기를 지금 증산도 지방 조직 수호사들을 본부로 소환한다면 오히려 수사기관에 의심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증산도 본부에서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그저 관계가 없는 척 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은 증산도 지도자(안세찬, 안중건)나 본부 간부와는 전혀 무관하며 오직 이근직 실장과 잡힌 3명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저지른 일이라는 외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와 안중건 종정은 해법을 놓고 입장이 달랐다. 그런데 그날 새벽 안중건 종정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만일 홍성렬 살인사건으로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간다 해도 왜 홍성렬이라는 놈이 반드시 죽어야 되는 천하의 악마같은 놈이라는 것을 당당히 얘기할 것이다.” 안중건 종정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 마자 이렇게 말하였다. “사부님!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안중건 종정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고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2001년에 있었던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2010년에 와서 붙잡힌 것은 분명히 안세찬 안중건 교주 부자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통을 주는 대두목이고 인간상제라고 생각했으므로 하늘은 홍성렬 살인사건을 덮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두 교주 부자가 그토록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설은 빗나가고, 신도들은 신앙에서 이탈하고, 조직은 계속해서 쭈그러들고 망해가고 있질 않는가! 그러던 차에 사건발생 9년만에 홍성렬 교수 부부 살해범으로 증산도 신도 3명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던가!
10. 홍성렬 살인교사자는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다
왜 이근직 실장은 2002년 6월에 의문의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는가? 그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다. 증산도 교리는 자살을 죄악으로 본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2001년 10월 25일 이후 그해 겨울과 2002년 봄으로 이어지는 몇 개월동안 아침 조례 때 마주쳤던 이근직 실장은 생기발랄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고민과 번민에 휩싸여 있었고, 어떤 때는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그런 모습이었다. 좁혀오는 경찰 수사망이 언젠가는 자기에게 들이닥치고 결국은 모든 것이 드러날 수 있음을 왜 생각하지 못했겠는가?
그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여 꼬리 짜르기를 하려고 했음을, 그가 믿는 몇몇 신도를 만나 자신이 떠난 이후 가족의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했음을 나중에 듣고 나는 알게 되었다. 2001년 7월호 개벽지에 실린 그의 글을 읽어보면, 이근직 실장은 안세찬과 안중건을 상제님의 대행자인 용봉龍鳳으로 믿고 있음을 능히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증산도 교리는 안세찬 종도사를 강증산 상제님과 버금가는 대두목이요, 인간상제로 규정하고 있었고, 대부분 신도들이 이를 확실히 믿고 있었다. 안세찬과 안중건은 일월부모요, 도통줄 대두목이었고, 죽은 귀신(신명) 마저도 사후세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권자로 믿어졌다.
1998년~2006년까지의 9년간은 안세찬과 안중건이 임박한 시한부 종말설을 강력하게 말한 시기였다. 특히 2001~2003년의 신사, 임오, 계미의 3년은 사오미 개명이라고 해서 곧 임박한 종말설이 강하게 퍼져서 많은 신도들이 군입대 회피, 재산정리, 직장정리, 반사회적인 경제행위 등을 해서 많은 돈을 바칠 때였다. 이른바 종말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 칠 때였다. 일반신도에서 간부신도에 이르기까지 다들 공(功)을 세우기 위해 포교하고, 성금내고, 기타 어떤 일이라도 할 때였다.
1999년부터 안세찬 안중건 교주부자는 신도조직을 제세핵랑군이라는 군대조직으로 개편하여 강력한 상명하복의 기강을 강조하였다. 신도들은 안세찬과 안중건을 인간상제, 인간하느님, 도통줄 대두목, 일월부모, 용봉 천자, 4체 하느님 등으로 확신하였고, 그들이 말한 시한부 개벽설설에 몰입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안세찬 안중건이 증산도 발전에 방해가 되는 인간악마가 홍성렬이라고 말했을 때, 당연히 그를 제거하여 천하사에 큰 공(功)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증산도의 조직문화는 한마디로 안세찬 안중건 부자의 이인 독재 체제였다. 많은 부서가 있었지만 부서장의 독자적인 활동영역은 크지 않았다. 부서의 모든 일은 사전에 보고되어 결재를 맡았으며, 그 결재된 범위 안에서 추진하는 이른바 사전 보고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려 있었다. 대부분 신흥 종교단체가 교주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통제되듯이 증산도도 마찬가지였다. 증산도 신도들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 증산도는 북한과 똑같다는 말이었다. 북한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세습과 독재체제인 것처럼, 증산도도 안세찬 안중건의 부자세습체제이며 독재체제라는 말이었다. 북한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을 민족의 태양이며 어버이 수령이라고 하는 것처럼, 증산도 신도들은 안세찬 안중건 부자를 일월부모라고 말하며, 군사부라고 하였다(안세찬은 태사부님, 안중건은 사부님 이라고 불렀다).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잡힌 사람은 증산도 신도 3명이다. 그들을 교사한 사람은 증산도사상연구소 행정실장 이근직이다. 즉 살해범은 모두 4명으로 이들은 모두 증산도 신도들이다. 이들에게 홍성렬이 사는 집과 홍성렬이 움직이는 행동반경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 부서는 증산도 산하 도전답사팀이었다. 도전 답사팀은 안중건 종정의 직속 부서이다. 도전 답사팀에 소속되어 있던 김ㅁ렬(65), 장ㅈ호(68), 공ㅂ걸은 모두 안중건의 직접 지시를 받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안중건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홍성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공병걸이었다. 공병걸은 자신이 증산도 신도임을 속이고 홍성렬에게 파견되어서 그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공병걸로부터 수집된 홍성렬에 관한 모든 정보는 안중건의 지시로 이근직에게 넘겨졌다. 공ㅂ걸(71)은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이 있은 직후에 증산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예산에 있는 홍성렬 교수의 자택으로 파견된 여신도도 있었다. 이ㅇ(600203)이라는 여신도였다. 당연히 증산도 신도라는 신분은 감추어진채 파견되어 홍성렬 교수부부의 삶을 보고하였다.
홍성렬 교수부부 살해사건은 이근직 실장과 장ㅇ진, 심ㅇ규, 이ㅇ석 등 4명이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다. 그 사건의 실체는 증산도 교주 안세찬과 안중건의 허락과 지시를 받은 이근직이 도전답사팀으로부터 홍성렬에 관한 자료를 제공받고, 증산도 재무부로부터 자금을 제공받아서 저지른 집단 살인이 확실하다.
2015년 12월 30일
진술인 노 ㅅ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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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꿈님의 댓글
백제의꿈 작성일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신앙이 도덕을 벗어나면 맹신이 되고, 신앙인이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라. 안타깝습니다,
상제님만세님의 댓글
상제님만세
백제의 꿈님,,범증산교사에,,홍교수님의 안타까운 주검이 기록 됩니까
백제의꿈님의 댓글
백제의꿈
저술원칙에서 밝혔듯이, 이미 기술하였습니다,
상제님만세님의 댓글
상제님만세 작성일
안씨,부자가 홍교수님을 ,참 많이도 두려워 했군요
모든,,진실은 상제님과 신명들이 알터,,,
안도사여,,죽을때에,,신명들이 불칼을 들고 달려 들것이니,,부디 입쩍은 하지 마오
상제님만세님의 댓글
상제님만세 작성일이,내용이,,증산도 홈페이지에 공개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